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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생활

입사 한달차 후기 - 의식의 흐름으로 쓰는 학생 vs 직장인

7월에 시작해서 일한지 한달이 넘었다. 아직 수습기간(Probezeit)이라 언제든 짤릴 수 있지만 눈치를 보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얼마 전 첫 월급도 받아서 기분 좋다!

학생일 때 취업 후 삶에 대한 우려가 두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씀씀이가 커져 다시 학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 두번째는 스트레스 많고 자기계발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첫번째는 아직 지켜봐야겠지만, 고장난 노트북과 청소기 때문에 첫달은 궁핍하게 살 것 같고. 두번째는 세달간 트레이닝을 끝내야 알 것 같은데, 첫 2년은 내가 배우고 싶은만큼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큰 장점은 안정감이다. 일도 나쁘지 않지만 직장인이라는 포지션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이 학생 때 성취에서 오는 만족감과 다른 행복을 가져다준다.

사실 공부할 때도 1년 남짓 풀타임 인턴을 했지만 정규직으로 일하는 데서 오는 안정감은 없었다. 지금은 내 자리가 어딘가 있고 누군가 날 필요로 한다는 데서 심리적 안정감이 생긴다. 이것 저것 일 벌리기 좋아하는 내 성격상 여기 안주할 지는 모르겠지만, 안주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일이 따분할 땐 "이걸 평생 해야 할수도 있다고?" 싶을 때가 있다. 주 40시간을 같은 사람들과 같은 방에 있어야 하는 것도 다르게 다가왔다. 만약 정규직 채용이 됐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이 별로라면... 끔찍할 것 같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선생님의 입장도 되어보고 다른 직장생활도 하다보니 학생의 좋은 점을 느꼈다. 특히 수업을 듣는다는건 교수님들도 날 가르치려고, 내 머릿속에 배움을 늘리려고 하시고 내 성장을 위해 맞춰진 커리큘럼을 익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치롭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다 논문을 쓰니 맨땅에 헤딩해야 해서 힘들었는데, 일하는건 아직은 그 중간인 것 같다.  

또 두번째 좋은 점: 주말이 있다!!!!!
공부할 땐 주7일 했었고 논문 쓸 땐 특히 자율스케쥴이지만 빡세게 공부했는데, 이젠 주중에도 집에 가면 더이상 일에 신경쓰지 않아도 돼서 좋다. 특히 사이드프로젝트 할 때 "이거 할 시간에 논문 쓰겠다" 같은 죄책감이 들지 않아서 좋다. 지난 주말, 스터디를 하지 않은 주엔 실-컷 놀았다! 앞으로 퇴근 후 독어 학원 시작하면 다르겠지만, 아직은 이 편안함을 누리고 싶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하러 가면 매월 돈이 나오고, 적어도 앞으로 2년간은 내가 어디서 뭘 할지 알고 있다는게 안온함을 준다. 계약서 싸인하고 간장이 떨어져서 아시아마트에 갔는데, 드디어 1L짜리 큰 간장을 살 수 있었다. 이걸 다 먹는 동안은 이사가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월급도 예전엔 인턴 월급이었다. 드디어 졸업하고 은행 어플에 앞자리 수가 늠름해진 월급이 찍히니 또 느낌이 다르다. 학생 때보다 씀씀이가 더 커진 것도 아니어서 저금할 생각에 신난다.

그렇다고 월급에 백퍼센트 만족하냐? 그건 아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대기업에서 훨씬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고, 회사에서 가끔 일이 따분하면 링크드인으로 다른 회사 포지션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회사 시스템이 내게 더 잘 맞는 것 같다. 작은 회사라 미팅도 한달에 한번. 질문 있을 때만 사수에게 하면 되고. 그래서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 누가 날 방해할 일도 없고. 화려한 복지는 없지만 보통 회사랑 비슷한 것 같다. 독어 수업도 서포트해주고. 업무 강도도 널널한 편인데 아직 휴가철이라 그럴수도! 앞으로 지켜봐야지.

예전에 썼지만, 지금 회사와 대기업 중에서 고민하다 이 회사로 왔는데, 가끔 내 선택이 옳은지 고민될 때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 다른 선택안이었던 대기업에서 학생으로 일해서 확신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많이 스트레스 받았고, 지금 거기서 일하는 친구들도 스트레스 받는걸 듣고 있다. 그들의 선택과 내 선택 중 한쪽이 나은 게 아니고 각자 우선순위가 다른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하루 경험이 행복하고 스트레스 안 받길 원해서 지금 기업에 온거고 그렇기 때문에 이 회사를 떠나는건 돈이 아닌 스트레스 때문일거다.

내 선택에 나름의 해자를 마련했는데, 이력서용 네임밸류가 좋지 않은(아무도 모르는) 기업이기 때문에 네임밸류를 쌓을 수 있는 다른걸 따로 시작했다.

적은 연봉은 주말에 사이드로 일하는걸로 보충하기로. 연봉에 상관없이 가르치는게 좋아서 계속 할 계획이었지만, 일에 스트레스 받지 않으니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돼서 만족스럽다. 독일은 수입이 클수록 세율도 쎄져서 연봉폭에 비해 세후연봉폭이 훨씬 작기 때문에 연봉이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비교적 적은 것 같기도 하다.

이걸 여기 다시 쓰는 이유도 FOMO가 올 때 읽으려고 ㅋㅋㅋ 미래에 혹시라도 후회할 때 이 결정한 이유를 알아두려고!  

일은 어땠나? 일 자체는 나쁘지 않다. 아직 훈련중이고 휴가철이라 다른 엔지니어들이 없기 때문에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8월 12일까지 홀드 상태. 그동안 회사 문서를 익히고 하드웨어 테스팅을 돕고 있다.

단 한가지, 하드웨어 팀이라 재택근무가 용이치 않다. 신입인 나에겐 좋지만 거의 텅 빈 오피스로 매일 출퇴근하는게 고역이다ㅠㅠ 출퇴근 시간이 길기도 하고.. 재택근무 때문에 소프트웨어로 갔다는 선배들이 백분 이해된다..

마무리로 친절한 동료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한달은 앞으로 직장생활에 비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 소감을 남기고 싶어서 쓴다.